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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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이 한창일 때에 모든 아마추어 오디션 참가자들을 잠시 묻히게 한 방송이 있다. MBC 김영희 PD가 2011년에 선보였던, 프로 가수들의 서바이벌 예능 〈나는 가수다〉이다. 2015년에 시즌3까지 하고 폐지되었으니 이제 폐지 10년이 되어간다. 이 방송은 프로 가수 7명이 노래 경연을 하고 7위 한 가수는 탈락하면서 다른 가수로 교체되는 룰이 있었다. 첫 가수 출연진은 김건모, 김범수, 박정현, 백지영, 이소라, 정엽, YB. 데뷔 연차도 꽤 있고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라 불리는 이들이 경쟁해서 탈락을 한다는 게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방송 출연에 승낙했다. 그런데 처음 탈락자로 최고참 김건모가 선정되자 약속과 원칙이 파기된다. 국민가수 김건모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서 시작하여, 김건모가 〈립스틱 짙게 바르고〉(임주리)를 다 부른 후 장난기가 발동하여 립스틱 바른 게 역효과를 줬다는 말이 많았다. 당시 YB의 매니저 역으로 출연하던 김제동은 굳이 나서서 말한다. “이번은 정말로 재도전 기회를 한 번은 주셔야 되는 게 맞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김제동은 경쟁 외적인 요소로 립스틱이 들어왔기에 이번 경쟁은 불공정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김건모는 재도전을 한다. 당연히 큰 논란이 생겼다. 〈나는 가수다〉는 룰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논란 속에서 프로그램을 잠시 종영한다. 김영희 PD는 하차했고, 약 한 달 후 방송이 재개했을 때도 PD는 교체된 채로 진행되었다. 실제로 김건모가 립스틱 발라서 7위를 했는지, 당시 김건모가 노래를 가장 못해서 7위를 했는지는 시청자들의 판단이 있을 것이다. 김건모는 〈나는 가수다〉 하차 후 토크쇼 출연해서야 후자가 맞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 립스틱을 포함한 모든 것은 김건모가 선택한 것이기에 모든 건 김건모 책임이다. 불공정 요소는 조금도 없다. 그래서 〈나는 가수다〉가 룰을 어기고 김건모에게 재도전 기회를 준 건, 김건모에게나 〈나는 가수다〉에나 김제동에게나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 차라리 김건모가 7위 했을 때 시원하게 나갈 수 있도록 김영희 PD를 비롯한 〈나는 가수다〉 제작진이나 김제동이나 다른 가수들이나 가만히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김건모 본인도 “〈나는 가수다〉는 내 삶의 큰 전환점”이라 한 것처럼, 탈락 이후 〈나는 가수다〉 밖에서 더 진정성 있게 노래했다면 그의 가수 인생이 더 시원하고 멋지게 빛났을 것이다. 경쟁에서 탈락한다고 해서 절대로 끝이 아니고 오늘이 절대 끝이 아님을 알면서, 우리는 때로는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다. 경쟁의 룰을 어기며 어설프게 경쟁자들과 함께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더 약하게 만든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하다 실패 혹은 탈락하는 일이 있더라도, 어설프게 탈락 번복하지 말고 정정당당히 경쟁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길 지향해야 한다. 〈나는 가수다〉는 늘 화제와 논란의 중심이었다. 재도전 논란 전부터 〈나는 가수다〉 반대론자였던 이들이 〈나는 가수다〉 자체에 대해 꾸준히 비판하여 더 주목받았다. 그들은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가수끼리 등수 매기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가득했고, 애초에 경쟁이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도전 논란에 대해서는 오히려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과연 그들의 비판은 타당할까? 〈나는 가수다〉 출연 이후 “수입이 50배 늘었다”고 밝힌 박완규도 사실은 〈나는 가수다〉 반대론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경쟁의 수혜를 자신이 상당수 얻은 셈 됐다. 이처럼 경쟁은 경쟁에 대해 회의적인 이에게도 어마어마한 성장을 가져다준다. 그는 자신이 〈나는 가수다〉에 대한 회의를 멈춘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배들의 곡이 대중 여러분에게 알려지고 여러분이 즐기게 됐어요. 걸그룹이나 아이돌 그룹에 잠식됐던 가요계를 풀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나오고 싶었어요.” 경쟁에 대해, 특히 프로 가수들의 경쟁에 대해 회의적인 이들의 분통을 샀던 〈나는 가수다〉는 결국 그 회의론자들을 포함한 국민 다수에게 감동과 감탄을 줬다. “얼굴 없는 가수”라 불리던, 가창력은 대한민국 Top이지만 방송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가수들이 주말 황금 시간대(골든타임)에 편성된 예능 〈나는 가수다〉에 출연할 수 있었고 노래할 수 있었다. 소름 돋는 가창력을 가진 가수들 그리고 최고의 연주와 편곡 실력을 갖춘 밴드로 인해 〈제발〉(이소라), 〈여러분〉(윤복희), 〈나 항상 그대를〉(이선희) 등 여러 명곡이 재조명될 수 있었다. 박정현은 자신이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4년 활동하면서 TV에서 노래하는 기회의 한계를 느꼈어요. 라이브 밴드와 열심히 연습해도 항상 그런 방송은 새벽에 방송되더라고요. 골든타임에 방송되는 프로에서는 노래를 2분 30초, 3분으로 잘라달라고 해요. 그런데 골든타임 지상파 TV에서 라이브 들려줄 수 있는 무대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보여줄 수 있는 기회만 생기면 해야 할 것 같았어요. 나가야 되는 책임감도 느꼈습니다.” 〈나는 가수다〉 명예졸업까지 하며 가수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은 박정현은 자신의 노래 〈꿈에〉와 〈첫인상〉(김건모),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조용필) 등 여러 명곡을 재조명시켰다. ‘재조명’이란 건 기성세대를 향한 말이 아니다. 이 노래가 나올 때 태어나지도 않은 세대가 이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게 해주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보았을 때, 〈나는 가수다〉에 경쟁 요소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건 그다지 좋은 의견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가수다〉에 대한 여러 비판 중 가장 들을 만한 의견은 가수 신해철에게서 나온다. “스스로 가위바위보에 져서 보컬 포지션 맡은 입장으로 저 같은 사람도 가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꼭 가창력 있는 가수들이 가수인 건 아니에요.” 그 역시 〈나는 가수다〉에 있는 경쟁 요소만을 보고 비판한 의견이 많아 아쉬움이 있으나, 이처럼 색다른 시선이 있었던 것만으로 그의 말은 들을 가치가 있었다. 고음을 잘 올리지 못하면 가수가 될 수 없다고 평가하는 현실에 대한 일침이자, “폭발적인” 무대만을 요구하는 〈나는 가수다〉에 대한 일침이기도 했다. 절제미 가득한 김연우가 핏대를 올려야만 하는 곳이 〈나는 가수다〉였다. 신해철의 말은 〈나는 가수다〉가 부흥하던 시기에는 크게 의미 없었다. 하지만 대중도 이제 고음 폭발에 질리고 새로운 것을 원할 때 신해철의 말이 들어맞았다. 대중은 사실, 가창력이 조금 떨어지거나 심지어 가수가 아닌 사람이 노래하더라도 큰 감동을 받는다. 〈나는 가수다〉는 이 점을 놓쳐 시즌2와 시즌3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후 MBC는 새로운 서바이벌 예능 〈복면가왕〉을 출범시켰다. 가수 아닌 사람도 노래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 우승은 늘 가창력 출중한 가수들이 한다 해도, 일찍 떨어진 출연자의 무대 즉 잔잔하고 부족한 노래를 들으며 감동하는 시청자 역시 적지 않다. 이로써 MBC는 또 한 번 음악 예능에 성공했다. 물론, 이 역시 관객들의 투표를 받는 등 경쟁 요소가 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2024-12-1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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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의 이전 작품을 꿰고 있는 누군가가 ‘베테랑2’(2024)를 본다면 당황스러울 수 있다. 류 감독 특유의 액션신은 변함없어 기대를 저버리지 않지만, ‘베테랑2’에 담긴 메시지를 보면 다른 사람이 제작한 영화를 보는 듯하다. 급진적인 변화가 있으면 찬반이 명확히 갈리듯, ‘베테랑2’도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크게 갈리고 있다. ‘베테랑1’(2015)이 1300만 명의 관객을 확보하며 높은 평점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이 상상 속에서나 원하던 것, 재벌을 무찌르며 카타르시스 느끼는 것을 단순하면서도 화려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재벌을 악마화하며 그리는 선악 구도가 억지이긴 해도 대중은 그런 이분법을 좋아한다. ‘베테랑1’이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를 범죄자가 아니라 선하고 매우 성실한 인물로 그렸다면 어땠을까? 볼 사람만 보는 영화가 됐을 수 있다. 안타깝지만, 재벌이 되기까지 또 재벌의 가족으로 살면서 매우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현실은 대중이 궁금한 게 아니다.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재벌의 삶을 시기하고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대중 심리를, 류승완 감독은 잘 이용했다. 그런데 ‘베테랑2’에서는 대중 심리를 이용하지 않고 대중 심리를 바꾸려 시도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놓고 심신 미약으로 징역 3년밖에 받지 않은 범죄자, 미투 운동으로 성범죄 가해자로 지목당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아무런 처벌받지 않은 대학교수 등 대중이 매우 싫어할 만한 사람들을 악의 구도에 넣지 않았다. 이들에게 사적으로 복수하려는 박선우(정해인)를 악의 구도에, 또 박선우와 싸우는 경찰들을 선의 구도에 넣었다. 법치주의를 지키는 것이 곧 선이라는 ‘베테랑2’의 메시지는 대중이 좋아할 만한 선악 이분법은 아니다. 불법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복수줘해야 대중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밀수’(2023)는 그걸 해줬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불법 밀수를 해서라도 성과를 얻어야 한다는 ‘밀수’의 이야기가 대중이 원하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도 이 사실을 안다. ‘밀수’ 감독도 류승완이다. 류승완 감독이 이토록 갑작스레, 회심하다시피 영화 속 메시지의 방향을 바꾼 계기가 있을까? ‘베테랑2’에서 보여주기로는, 법을 지키지 않으며 사적 제재를 가하는 것이 또 다른 억울한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는 걸 류 감독이 새롭게 깨달은 게 아닐까 예측된다. 영화에서도 나오듯 법치 질서가 무너지면 언론 질서까지 무너져 유튜브 음모론이 곧 진실인 양 퍼질 테니, 류승완이 영화감독으로서 오늘날의 미디어 체계에 대해 당장이라도 생각을 바꿔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베테랑2’가 갑작스레 생긴 변화와 대중 심리에 반하는 내용으로 갖춰진 영화다 보니, 많은 평론가와 관객이 말하듯 내용 전개상 아쉽고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류승완 감독에 대해 감 떨어졌다고 말할 건 아니다. ‘범죄도시’ 같이 경찰을 선의 구도에, 범죄자를 악의 구도에 넣는 게 얼마나 쉬운가? 류 감독은 매우 어려우면서도 색다른 시도를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할 만하다. 무엇보다, 류승완 감독의 바뀐 입장이 이전 작품에서 보인 것보다 훨씬 사회 정의에 가깝기에 환영이다. 억지 이분법을 쓰지도 불법을 미화하지도 않으며 한 시도가 ‘베테랑2’였다. 비록 호불호가 갈리더라도, 대중이 이를 보며 논의할 수 있고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영향이다.

2024-12-0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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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23년간 유대인 학생들을 가르쳐 온 수지 오 교장이 지난 2015년 EBS ‘EBS 초대석’ 방송에서 남긴 말이 있다. “한국 학부모는 교육 전문가의 말보다 옆집 아줌마의 말을 더 신뢰한다.” 이 말에 마냥 웃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한국 사교육만 봐도 어떤가? 공부 잘하는 옆집 아이가 가는 학원을 내 자녀도 따라 보내는 게 한국 사교육의 구조로 자리 잡지 않았나. 물론 사교육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옆집 아이 따라 하는 것도 항상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내 자녀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또 이 상황에 맞는 교육이 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큰 문제가 된다. 돈은 돈대로 날리고, 부모와 자녀 간의 신뢰 관계도 많이 흐트러진다. 자녀를 향한 사랑보다, 내 자녀를 옆집 아이와 비교함으로써 생기는 열등감이 우선되면 생기는 문제다. 비교 의식이 더하고 더해져 학원가에 ‘초등 의대관’ 바람이 불어온 지도 꽤 되었다. 의대 열풍에 힘입어 초등학생 때부터 선행학습에 힘쓰며 의대 진학 코스를 만들어주겠다는 마케팅이다. 내 자녀가 다른 아이보다 어떻게든 빨리 진도 나가길 원하는 학부모들에게는 이것만큼 매력적인 게 없다. 하지만 이렇게나 빠른 선행학습을 하고도 좋은 실력을 갖추는 학생은 소수다. 아직 공부에 동기 부여가 전혀 안 된 상태라 학원만 대충 왔다 갔다 하는 학생도 많고, 차라리 그 시기에 친구들과 놀거나 책 한 권 더 읽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도움 되는 학생도 많다. 소위 1타 강사라고 하는 이들의 말만 들어봐도 어떤가? 선행학습은 6개월에서 1년 전에만 해도 전혀 늦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애초에 ‘초등 의대관’이 학원 이름에 들어가는 것부터도 문제가 있다. 공부 잘하면 다 의대 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의사가 가장 안정적인 직업인 건 사실이라 ‘초등 의대관’이라는 이름은 자녀가 안정적인 미래를 갖길 원하는 부모의 마음을 잘 이용했다. 하지만 이는 그 아이와 대한민국의 장기적인 미래를 봤을 때 그다지 좋은 마케팅은 아니다. 의사보다 불안정해 보이는 직업이라도 자녀에게 잘 맞는 일이 분명히 있고, 이로써 의사보다 훨씬 큰일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의 잠재력을 지켜줘야 한다. 늘 그랬지만 오늘날은 특히, 돈을 많이 쏟아부어야 공부 잘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1년에 100만 원이면 전 과목 1타 강사의 강의를 인터넷으로 모두 들을 수 있다는 건, 수험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건 ‘가정’의 회복이다. 가정에서 자녀를 비교 의식의 굴레에 두는 게 아니라, 독립된 한 사람으로서 비전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저 안정적인 삶만을 자녀에게 주입시키며 돈만 쏟아붓는다면, 자녀의 잠재력과 그 돈은 어디론가 사라질 뿐이다. 황선우 (문화평론가, 작가)

2024-11-0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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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전쟁’을 부제로 단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경연 참가자들의 계급은 백수저와 흑수저로 나뉘었다. 백수저는 쉽게 말해 유명 요리사, 흑수저는 무명 요리사라 볼 수 있다. 흑수저에도 유튜브나 다른 예능 통해 꽤 이름 알린 승우아빠(목진화), 평가절하(박정현) 등 있지만, 백수저에는 오로지 요리사로서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를 통해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들이 속해 있기에 흑수저는 이들에 비하면 무명이 맞다. 흑수저에는 요리사 80명, 백수저에는 20명이 속했다. 흑수저는 1라운드에서 20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백수저는 20명 모두 부전승이었다. 이때부터 작은 논란이 있었다. 백수저가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부전승하는 건 불공정하지 않냐는 것이다. 하지만 백수저 요리사들이 레거시 미디어에 섭외받고 시청자들에게 인정받아 유명해지기까지의 능력은 인정해야 한다. 미디어를 통해 나오는 것이 다 옳지는 않고 다른 실체가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요리사이기에 이들이 만든 음식의 실체는 알기가 쉽다. 직접 이들의 식당에 가서 먹어보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손님들에게도 인정받은 사람들이 백수저다. 그런 점에서 백수저의 부전승은 불공정하지 않다. 애초에 백수저가 유리한 계급도 아니었다. 이미 스타인 사람이 경쟁 예능에 출연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가? 백수저의 음식은 심사위원 백종원과 안성재라면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기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반면, 흑수저의 음식은 심사위원이 기존에 먹어보지 못했던 거라 신선하기도 하다. 또한 흑수저는 실수한다고 해도 백수저에 비해 티가 덜 난다. 백수저는 조금만 실수해도 흑수저보다 마이너스가 크다. 백수저가 경쟁 예능에서 지는 모습을 보일 경우 잃을 게 많지 않은가? 이겨봐야 본전인 상황이 될 수 있다. 반면, 흑수저는 져도 잃을 게 많지 않고, 이길 경우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경쟁 예능에서는 기존에 방송 노출이 적었던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비슷한 예로, 프로들의 경쟁 예능 중 원조라 불리는 MBC ‘나는 가수다’에서도 기존에 “얼굴 없는 가수”라 불렸던 김범수, 박정현, 더원 등이 가장 주목받았다. 이들의 히트곡은 그전부터 있었지만, 애초에 방송 출연이 적었던 가수들이라 노출된 게 적었던 것이 이들의 신선함과 다양한 무대를 향한 도전 정신을 뽐내는 데 도움됐다. JTBC 예능 ‘싱어게인’에서도 한때 유명했던 가수들보다 데뷔 이후 쭉 무명 가수였던 이승윤, 김기태, 홍이삭이 더 큰 사랑을 받고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흑백요리사’ 2라운드에서 심사위원이 안대 쓰고 심사하는 건 오히려 백수저에게 도움됐을 것이다. 또한 3라운드부터 심사위원이 다시 안대를 쓰지 않으면서 백수저에게 불리한 상황이 다시 왔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우승도 흑수저에 속한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이 거머쥐었다. 과연 백수저 요리사들은 무엇을 얻고자 경쟁 예능에 출연했을까? 출연료야 받겠지만 그게 백수저에게 그리 필요하진 않았을 거다. 예측해 보건대, 그간의 매너리즘 떨쳐내고 새롭게 도전하고 싶어 출연 결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런 모습 역시 감동적이다 보니, 백수저 에드워드 리가 결승전에서 흑수저에게 지고도 현재 대중으로부터 큰 찬사를 얻고 있는 게 아닐까. 계급 전쟁으로 시작한 ‘흑백요리사’. 결과적으로 이들의 경쟁은 계급과 무관했다. 흑수저든 백수저든 끝까지 정정당당하게 최선 다한 요리사는 얻고 가는 게 많았다. 이들의 경쟁은 상대 계급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흑수저는 백수저 앞이라 해도 기죽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백수저는 자신이 백수저라 해도 끝까지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도전을 위해 부딪쳐야 했다. 황선우 (문화평론가, 작가)

2024-10-27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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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감 선거할 때면 항상 올라오는 말이 있다. “교육을 받는 사람이 청소년들인데 왜 교육감을 청소년이 안 뽑고 어른이 뽑냐”는 것이다. 이재정 전 경기도 교육감 역시 “교육감 선거 연령 만 16세로 낮추자”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게 ‘교육’이 아니며 청소년은 아직 분별력을 키워야 하는 시기에 있기에, ‘꼰대’ 소리를 듣더라도 교육감 선거 연령 하향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비슷한 상황의 학교 드라마가 있다. 청소년이 주인공인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2022), 공교롭게도 19금이라 청소년이 볼 수 없다. 드라마 제목 그대로 ‘지금 우리 학교는’ 어떤 상태인지 보여주는데,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든 이는 학교와 학생들의 현실을 학생이 아닌 어른이 보고 생각하도록 이끌어준다. 그동안 개봉된 학교 드라마는 청소년들을 주된 시청자로 삼았으나 이 드라마는 결이 다르다. 어떻게 보면 꼰대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교육감 선거도 그렇듯, 어른들만 볼 수 있더라도 이를 통해 어른들이 청소년들의 현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면 결국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다. 좀비와 함께하는 ‘지금 우리 학교는’ ‘지금 우리 학교는’이란 드라마는 영화 ‘부산행’(2016)에 이어 개봉된 K-좀비 콘텐츠다. 특히 이 드라마는 학교에서 시작된 좀비 바이러스로 인해 한 도시가 마비되는 걸 보여주는데, 단순히 잔인하고 징그러운 좀비만 보고 끝날 게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학생들이 좀비가 되는 걸 보면, 현실에서도 좀비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좀비란 결국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무언가 악한 것에 이끌리듯 나아가는 존재인데, 교육자들의 잘못된 방향성이 학생들을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조희연 전 서울 교육감이 비리로 얼룩진 채 교육감 자리에서 퇴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교롭게도 조희연 전 교육감이 걸어온 실패의 길이 ‘지금 우리 학교는’에 꽤 녹아있다. 드라마에서 좀비 바이러스(요나스)의 근원이 효산고등학교임에도 어른들은 무관심했다. 학교 밖으로 나간 좀비에만 관심 있고 근본은 해결하지 못했다. 좀비 바이러스는 효산시 전체로 퍼졌다. 그리고 학교 안에서 살아남은 학생들이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려 컴퓨터를 켰으나 정부는 “가짜뉴스가 퍼진다”라며 인터넷을 폐쇄했다. 가짜뉴스가 있었던 것이야 사실이겠지만 정부는 어리석게도 모든 표현을 거세시켰다. 가짜뉴스를 막겠다며 국회에서 발의한 ‘언론중재법’(2021년 개정안)의 논리다. 이에 학생들은 인터넷을 시작도 못하고 더 큰 위기에 직면했다. 학생들에 대한 관심은 온데간데없고 어른들의 정치 논리만 앞세우는 모습이다. 효산고 교장 선생님(엄효섭)은 어땠나? 많은 학생이 좀비로 변하는 위기에 처했음에도 혼자 교장실에 숨었다. 이런 모습은 그전부터 드러났다. 학교폭력 피해자 학생이 있음에도 모두 숨기고 학교 이미지만 좋게 만들려 할 때였다. 그의 지독한 이기심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마치 2014년 세월호 사고의 선장, 그리고 이 사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정치인들을 보는 듯하다. 또한 드라마를 보면, 지금 우리 학교는 카카오톡으로 선생님과 학생이 소통한다. 스마트폰 관리가 잘 되지도 않고, 스마트폰 중독에 빠진 학생이 많은 건 물론, 극단적으로는 학교에서 성폭행하는 걸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기도 한다. 실제로 초등학생만 되어도 스마트폰이 생기는 것이 오늘날의 분위기다. 과연 청소년이 스마트폰 내의 수많은 미디어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속에서 잘못된 문화를 보고 분별할 수 있을까? 분별력을 갖추기 위해 많은 것을 쌓아나가야 할 시기, 즉 아직 분별력을 갖추기 전인 청소년에게 스마트폰을 통한 권리를 늘려주는 것이 적절할까? ‘조희연표 정책’ 중 대표격인 ‘학생인권조례’가 학교 내의 학생들에게 스마트폰 사용 권리를 보장해 준 것이 학생들의 삶을 바르게 이끌어줄까? 이는 학생들이 건전한 세계관을 쌓아야 할 시간에 미디어가 말하는 대로 이끌려가는 좀비 같은 어른으로 만든다. 현실의 좀비로 살아가는 어른들에 대해서는 어떤가. 그들이 수많은 경로를 통해 잘못된 세계관에 빠져 좀비처럼 말하고 행동할 때, 그들을 비판하고 처벌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것도 필요하겠으나, 근본을 해결하려면 또 다른 좀비가 다시는 나오지 않게 조치 취하는 것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청소년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가정, 학교, 그리고 미디어를 보고 아이들에게 바른 방향을 제시할 때 해결할 수 있다. 가정에서 자녀들의 인성보다 성적에 관심 가지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편향된 교육과정 주입시키고, 청소년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악한 세계관이 들어가게 하는 미디어를 키운다면 청소년들은 현실의 또 다른 좀비로 양성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학교는’ 너머의 메시지 드라마에서 좀비 바이러스를 처음 만든 건 무엇이었나? 복수심이었다. 아들이 학교폭력 당한 것에 복수하고 싶었던 과학교사 이병찬(김병철)은 천재적인 능력으로 좀비 바이러스를 만든다. 그리고 아들을 괴롭혔던 학생을 감금하여 바이러스 실험을 한다. 학생은 좀비가 되었고, 감금이 해제되면서 바이러스를 퍼뜨린다. 결국 바이러스는 학교폭력 가해자 학생들을 좀비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에 더하여 피해자 학생들까지도 좀비로 만들었다. 물론 교장의 이기심으로 학교폭력 문제가 제대로 다뤄지지 못한 것이 이병찬을 크게 괴롭혔을 테지만, 복수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의 끝은 모두를 황폐화시켰다. 어른의 왜곡된 복수심을 끊어내지 못하면 아이들만 피해 본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은 오늘날의 학교 현실을 은유적으로 알려주면서도, 미혼모 박희수(이채은)의 아기 사랑과 박선화(이상희) 선생님의 제자 사랑 등을 보여 재미와 감동이 있다. 아쉬운 점은 억지가 많다는 점이다. 남온조(박지후)의 아버지 남소주(전배수)가 굳이 죽지 않고도 다 같이 살 수 있는데 억지 희생 장면을 그려 억지 감동을 이끈다. 또 효산시에 퍼진 좀비를 잡기 위해 폭격 명령을 내린 계엄사령관 진선무(김종태)가 죄책감에 빠져 자살하는 부분이 그렇다. 좀비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서는, 바이러스 만든 이병찬이 말했듯 좀비를 모두 잡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고 사령관은 유일한 방법을 이행한 것이다. 거기서 사령관이 자살하는 장면을 굳이 넣은 것은, 문제 상황에 현실적인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굳이 죄책감을 심어주려는 것일까. 억지 코드를 넘어 청소년의 삶을 바라보자. 청소년들을 좀비와 같은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 있다면 어른이 먼저 해결해야 한다. 어리석은 정치, 어른들의 이기심과 복수심, 그리고 청소년을 향한 지나친 권리 부여가 청소년들을 좀비로 만들고 있다. 현실의 효산시에 사는, 좀비가 될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출할 자 누구인가. 그간 지독히도 퇴행했던 교육 현장을 회복시킬, 교육감을 비롯하여 많은 진실된 어른이 필요하다. 이기심과 복수심으로 뒤덮인 학교에서 학생 한 명이라도 더 지켜주려 했던 박선화 선생님처럼, 자신이 좀비가 되었을 때 자신을 묶어서라도 자녀를 지켜줬던 미혼모 박희수처럼. 황선우 (문화평론가, 작가)

2024-10-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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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초등학교 1학년이면 한글은 당연히 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영어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자녀에게 영어유치원 보내는 집이 굉장히 럭셔리한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반면, 연예계 대표 잉꼬부부 션·정혜영의 자녀들은 한글을 떼지 못한 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엄마 정혜영은 첫째 딸 하음이의 친구가 한글은 물론, 영어에 중국어까지 눈을 뜬 걸 보고 걱정이 들었다. 심지어 하음이의 유치원 선생님까지도 “하음이가 위축이 돼서 안 배우려고 할 수 있어요”라 말했다. 이에 아빠 션이 중심을 잡아준다. 션은 정혜영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른 아이들이 ‘사랑’이라는 글자를 다 읽을 수는 있어도 그 정확한 뜻을 모르는 아이들은 많을 거야. 우리 하음이는 ‘사랑’을 읽을 줄은 몰라도 그 ‘사랑’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 늦어도 괜찮아.” 이에 덧붙여 션·정혜영 부부는 ‘때가 되면 다 하게 되어있고’ ‘아이들이 원할 때 가르쳐주자’는 교육철학이 있음을 말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읽을 줄 아는 것보다, ‘Love’라는 단어를 읽을 줄 아는 것보다 사랑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그 사랑을 전하는 걸 먼저 배워야 한다. 그것이 될 때 ‘사랑’과 ‘Love’라는 단어를 더 잘 사용할 수 있다. 배우 최수종·하희라 부부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그들의 자녀들도 한글을 떼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건 하희라의 교육방침 덕분이었다. 학교에서 배울 것을 미리 공부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게 중요하고, 또 무엇보다 인성교육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한글을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힘든 때가 왔다. 말 잘하고 꾸며내기를 잘하는 사람은 정말 많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다음세대에게 선한 것을 전해주기 위해 힘써야 한다. 남보다 한글과 영어를 더 잘 쓰도록 가르치기 이전에, 한글과 영어를 바르게 사용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교육부가 시행해온 것처럼, 영어유치원을 법적으로 제재하는 건 실질적인 결과를 얻지 못하고 역효과만 불러온다. 가정과 의식의 변화 없이 법만 생긴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말하고 글 쓰는 일은 더디더라도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내는 게 먼저임을 부모와 자녀 모두가 알아야 한다. 황선우 (문화평론가, 작가)

2024-10-1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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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몇 살일까?” 하고 물으면 “반만년”이라 답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반만년의 역사를 ‘한국사’라는 이름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제(2024) 76년 됐고, 이 한국이 우리나라다. 1919년 건국론자들이 주장하듯 올해를 건국 105년으로 계산하더라도 반만년은 틀린 계산이다. 반만년의 역사, 즉 대한민국 건국 전까지도 모두 포괄한 역사를 말하려면 한국사가 아닌 ‘한반도 역사’라고 하는 것이 맞다. 왜 우리나라 나이를 반만년이라 하는 걸까? 우리 것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조선도, 고려도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나라’라고 뭉뚱그려, 우리나라가 아닌 나라에 대해서도 경계가 허물어졌다. 이는 ‘헬조선’이라는 단어에서도 나타난다.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처음에 만들어진 건 2010년 ‘디시인사이드’ 커뮤니티에서다. 커뮤니티 사용자들의 “헬조선”이라는 말이 향했던 곳은 이씨 조선(1392-1910)이었다. 천민과 여성들을 핍박하고 중국의 속국인 채 계속하여 퇴보하는 조선이 헬(Hell, 지옥)과 같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단어가 퍼지면서 의미의 변화가 생겼다. 이제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 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이나 기업가 등 소위 고위직 인사들의 부정부패 세태를 헬조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부정부패 저지르는 고위직 인사들에게서 조선시대 양반의 모습이 보인다는 의미였다. 헬조선은 이후 한 단계 더 변화했다. 현재 쓰이고 있는 의미는 대한민국의 특정 개인을 넘어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바라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실업 문제나 양극화 등의 책임을 자본주의 체제에 둔다. 이러한 구조론적 세계관을 통해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조선의 신분제처럼 특정 사람들만 잘 먹고 잘 살게 한다는 의미다. 이로써 헬조선은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을 비판하는 좌파 용어가 되었다. 최근 소설 ‘한국이 싫어서’(장강명)가 영화로 개봉되고 헬조선 담론이 다시 올라왔다. 역시나 대한민국의 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였다.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니 탈출하는 게 가장 좋고 그게 아니라면 이 지옥 속에서 최대한 버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헬조선에 대한 개념이 잘못 결합되니 할 수 있는 말이다. 대한민국을 탈출하겠다는 사람 잡을 수 없고 헬조선이라 비판하겠다는 것 막을 수 없지만, 잘 모르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방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어 집필한다. 무엇이 진짜 ‘헬조선’인가?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조선의 신분제와 정말 다를 바 없을까? 자본주의와 신분제의 공통점이라 하면 ‘격차’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신분제와 달리, 모든 인간에게 자유를 준다. 이 자유를 가지고 개발과 경쟁을 해서 경제 발전을 이룬다. 그리고 이 발전은 빈(貧)층을 함께 끌어올린다. 신분제는 체제가 노예를 만들어내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특정 개인이 스스로 노예가 되지 않는 한 모두가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다. 대한민국과 조선, 자본주의와 신분제는 명백히 구분된다. 그래서 사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헬조선’ 용어의 의미는 애초에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성립과 불성립 자체를 부정하는 상대주의적 역사관이 지금의 헬조선을 완성시켰다. 자본주의와 신분제의 ‘격차’라는 공통점 하나와 ‘상대주의’가 대한민국과 조선 사이의 경계선을 무너뜨렸다. 격차를 부각하기 위해 상대적 박탈감 프레임을 강화하고 인간을 계급화한다. 소유하고 있는 자본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양 말한다. 사랑도, 비전도, 행복도 모두 계급이라는 울타리 너머에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망상은 좌파들에게 헬조선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좌파 정책을 펼치고, 빈층을 더 빈곤하게 만든다. 실업 문제와 양극화는 더 심해져 마치 조선의 신분제를 연상케 한다.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라 외치는 자들이 대한민국을 진짜 헬조선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진짜 “헬조선”이라 부를 거라면, 대한민국이 조선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두고 불러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헬조선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면, 대한민국이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대한민국의 정통성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켜야 한다. 전근대적인 신분제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유 대한민국 국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사회에서 만들어놓은 계급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온전한 개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남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을 규정짓고 계급화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며 성숙해나가야 한다. 자신이 경쟁해서 이겨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계급이라는 울타리 너머를 바라볼 게 아니다. 사랑도, 비전도, 행복도 사실은 매우 가까이 있다. 황선우 (문화평론가, 작가)

2024-10-05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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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된 북한 소재 영화 ‘공조2’, ‘육사오’, ‘헌트’ 등은 재미는 있었으나 감탄·감동은 없었다. 북한을 그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그저 하나의 ‘미스터리’를 담고 있는 장소 정도로만 그렸기 때문이다. 북한의 참혹한 현실은 말하지 않은 채, 관객으로 하여금 북한을 그저 ‘신기한 곳’ 정도로만 느끼게 제작한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개봉된 영화 ‘탈주’는 오랜만에 북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그러면서 재미도 있었고 감동도 함께 다가왔다. 목숨 걸고 탈북하는 임규남(이제훈)의 스토리를 담았고, 북한 고위층을 결코 미화하지 않았다. 북한 보위부 장교 리현상(구교환)이 동성애 하는 듯한 내용이 있었지만, 이는 동성애 미화는 아니었고 북한 고위층이 그만큼 음란함을 더 보여줬다. 영화의 메시지 또한 정확했다. 영화 후반 임규남의 대사, 북한군 병사였던 임규남이 분대장 승진을 거부하고 탈북하면서 남긴 말이다. “실패하려고 가는 거예요. 여기는 실패도 할 수 없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게 다 정해져 있는 북한에서, 자신의 계급(성분)을 바꿔주겠다고 하는데도 거부하면서 한 말이다. 친북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자주 말하는 “대한민국도 금수저나 잘 살고 나머지는 거기서 거긴데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낫다고 할 수 있나?” 같은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이다. 임규남의 말이 맞다. 임규남도 탈북 후 대한민국에서 대출까지 끼면서 창업을 시작하지만, 북한에서보다 삶이 나은 건 물론 애초에 도전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에 삶이란 걸 살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금수저만 잘산다’는 건 헛소리에 불과하다. 북한에서 들어맞는 소리도 아니다. 북한 고위층인 리현상도 자신의 삶을 포기했으니 북한에 머무르는 것이지, 그에게도 한때 갈망하던 비전이 있었다. 즉, 북한 고위층이나 조선시대 양반으로 사는 것보다 대한민국의 일반인으로 사는 게 훨씬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 영화에서 보여준다. 임규남의 삶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도 큰 메시지를 남긴다. 대한민국의 청년들, 문재인 정부 때 공무원 늘린다 할 때는 공무원 하고 싶어 난리더니, 윤석열 정부 들어 의대 증원하니 의사 되겠다고 난리다. 공무원과 의사 모두 매우 좋은 직업이지만, 도전 정신은 사라진 채 그저 안정성만을 바라보며 공무원과 의사 하겠다고 하니 이 좋은 직업들이 점점 초라해진다. 청년들이 바라는 건 뭔가? 북한 고위층처럼, 꽤 높은 자리에 있지만 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삶인가? 당장은 미래가 밝아보이지 않는다. 또 이런 상황에 문재인 정부나 윤석열 정부나 공무원 늘리고 의대 증원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미래를 더 어둡게 만들고 있다. 이 모든 것에 ‘탈주’ 임규남의 삶이 좋은 메시지를 남기길 바란다. 황선우 (문화평론가, 작가)

2024-09-19 21:52